HOME | Site Map | 수상/선정 | 운영자 소개

 

전통문화 이야기

 home > 전통문화 이야기 > 간지이야기 > 간지사건1- 조선전기 >>

 

 

  간지이야기 - 대문

  간지와 역법

  간지에 대한 지식

  간지의 생활 속 적용

  간지 활용의 해결책

  육십갑자 연도적용 일람표

  간지관련 사건 목록/용어

   간지 사건1 - 조선전기

   간지 사건2 - 조선후기

   간지 사건3 - 조선근대

 

 

 

조선조의 간지 관련 사건[1] - 연대순 [조선 전기]

 

 

간지 관련 사건

사건 개요

무인정사
(戊寅靖社)

1398년
태조 7년

◈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사이의 싸움으로 제일차왕자의난(第一次王子-亂), 방원(芳遠)의 난, 정도전(鄭道傳)의 난이라고도 한다. 정사(靖社)는 종묘사직 곧 국가를 잘 다스리게 한다는 의미이다.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개국(開國) 후 창업공신(創業功臣) 정도전 일파와 태조의 제5왕자 방원 일파 사이의 권력다툼이 일어나는데, 마침 계비 강씨 소생인 제8왕자인 방석(芳碩)이 세자가 되자 방원이 정도전 일파와 세자 방석을 제거한 사건이다.

계해조약
(癸亥條約)

1443년
세종 25년

◈ 조정을 대표하여 변효문(卞孝文) 등이 일본의 쓰시마 도주[對馬島主]와 세견선(歲遣船) 등에 관하여 맺은 조약.
 1419년 쓰시마섬을 근거지로 하여 말썽을 부리던 왜인들을 정벌한 후, 한동안 조선·일본 사이의 왕래가 중단되었으나 쓰시마 도주의 간청으로 다시 삼포(三浦)를 개항하여 무역과 근해에서의 어획을 허락하면서 후환을 염려하여 종전에 비하여 상당한 제한을 가하는 구체적 조약을 체결하였다. 세종은 왜인들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먼저 위세를 떨쳐 그들을 정벌한 다음, 다시 은정(恩情)을 베풀어 그들의 살길을 열어주었다.

계유정난
(癸酉靖難)

1453년
단종 1년

◈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
 세종(世宗)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文宗)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수양대군은 1453년 문종의 유탁(遺託)을 받은 삼공(三公) 중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경진북정
(庚辰北征)

1460년
세조 6년

◈ 함길도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가 이끄는 조선군이 조선의 변방을 자주 침략하던 두만강 유역에 본거지를 둔 모련위(毛燐衛)의 우량하[兀良哈] 여진족을 정벌한 사건.
 결국 여진족은 조선에 복종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조선의 국경개념은 더욱 북상·확대되었다. 1461년 갑산군을 도호부로 승격하여 진을 두고 삼수(三水)에 다시 군(郡)을 두는 등 갑산·삼수 지역의 방비를 강화하고, 조선영토로 간주하지 않았던 무산군(茂山郡) 지방을 조선의 영토로 끌어들여 이 지역에 하삼도(下三道)의 이주민이 정착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무오사화
(戊午士禍)

1498년
연산군 4년

◈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 사류가 유자광(柳子光) 중심의 훈구파(勳舊派)에게 화를 당한 사화 사건.
 1498년 《성종실록》이 편찬되자, 실록청(實錄廳) 당상관(堂上官)이었던 훈구파 이극돈이 사림파인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 하고, 이를 문제삼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고해,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이와 같은 죄악은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었다.

갑자사화
(甲子士禍)

1504년
연산군 10년

◈ 연산군이 자신의 어머니인 성종의 비였다가 폐출(廢黜)되어 사사(賜死: 1480년)된 윤씨(尹氏)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士禍).
 윤씨 사사(賜死)에 관여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는데, 이후 국정과 문화발전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곧 많은 선비가 수난을 당하여 학계가 침체되었고, 연산군을 비난하는 한글 방서사건(榜書事件)으로 언문학대(諺文虐待)까지 일어나 이후 국문학 분야까지 악영향을 끼쳤다.

경오왜변
(庚午倭變)

1510년
중종 5년

◈ 3포{부산포·내이포·염포}에서 일어난 일본인 거류민의 폭동사건으로 삼포왜란(三浦倭亂), 삼포의 난이라고도 함.
 3포를 개항한 이후 무역과 거류가 확대되어 계해(癸亥)조약 때 맺은 내용을 어기기 시작한 일본은 중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더욱 교만해져 조선의 통제에 대한 반발로 일으킨 반란이다. 이 난으로 조선과 일본 간의 교통이 중단되었는데, 일본이 다시 수교할 것을 간청해 와 계해조약을 개정하여 새로 임신(壬申)조약을 체결, 내이포만을 개항(開港)했다.

임신조약
(壬申條約)

1512년
중종 7년

◈ 조선과 쓰시마도주[對馬島主]가 맺은 조약. 국가재정을 고려하고 대외정책의 운용면의 시정을 위해 단행했다.
 내이포(乃而浦:熊川), 부산포(富山浦:東萊), 염포(鹽浦:蔚山)의 3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이 진장(鎭將)과의 충돌로 난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3포를 폐쇄하고 왜인과의 교역을 끊었는데, 주부식물(主副食物)의 공급을 대(對)조선 교역에 의존해오던 왜인들은 당장 생활에 곤란을 느껴 쓰시마도주는 조선과의 통교 재개를 위해 왜란의 주모자 참래(斬來), 피거인송환(被據人送還), 난야기(亂惹起)의 사죄 등 조선측의 요구조건을 이행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 정부에서는 왜와의 지리적 인접관계, 왜란 전까지의 일본관계, 교린정책이란 대의명분과 북서변 야인들의 소요 등을 감안, 9개 항목으로 된 임신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쓰시마도주의 간청을 들어주어 국교가 재개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이전보다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왜인들을 제약할 수 있게 되었다.

기묘사화
(己卯士禍)

1519년
중종 14년

◈ 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 사류(新進士類)가 축출된 사건.
 중종반정으로 중앙에 진출하게 된 사림파는 도학사상만을 강조하여, 훈구파를 소인으로 지목하여 철저히 배척하며, 현실을 무시하고 급진 정책을 시행하는 등 지나친 이상주의를 펼쳐 결국 훈구파는 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후궁인 것을 이용하여,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의 4자를 쓴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走·肖' 2자를 합치면 조(趙)자가 되기 때문에, 주초위왕은 곧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기에, 남곤·심정(沈貞)·홍경주 등 훈구파의 사주도 있었지만, 신진 사류의 급진적·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결국 신진사류를 몰아내어 조광조는 능주(綾州)로 귀양가서 사사되고, 김정(金淨)·기준·한충·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결했다.

신사무옥
(辛巳誣獄)

1521년
중종 16년

◈ 신사년에 일어난 안처겸(安處謙) 일당의 옥사.
 안처겸은 이정숙(李正淑)·권전(權) 등과 함께 기묘사화로 득세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 하여 이들을 제거하기로 모의했는데, 송사련(宋祀連)은 이러한 사실을 고변할 것을 모의한 후, 안처겸의 모상(母喪) 때의 조객록(弔客錄)을 증거로 삼아 고변해 안처겸,안당 등 10여 명이 처형되었고, 송사련은 그 공으로 당상관이 되어 이후 30여 년간 득세하였다.

을사사화
(乙巳士禍)

1545년
명종 즉위년

◈ 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몰아내어 사림(士林)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
 종종 말기에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와 윤지임(尹之任)의 딸인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외척간의 권력 싸움에서 시작되어 다음 인종(仁宗)대 장경왕후계의 대윤(大尹) 득세했다가 8개월 후의 명종 즉위 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소윤(小尹)이 정권을 잡고 대윤을 대거 몰아낸 사건이다. 1498년(연산군 4) 이후 약 50년간 관료간의 대옥사(大獄事)는 을사사화가 마지막이 되었지만, 사림세력은 중앙에 대거 진입하게 되었다.

정미약조
(丁未約條)
1547년
명종 2년

◈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1544) 이후 단절되었던 일본과의 국교를 다시 허용한 조약.

정미사화
(丁未士禍)
1547년
명종 2년

◈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여파로 일어난 사화(士禍)로 "벽서(壁書)의 옥(獄)"이라고도 한다.
 괴벽서사건(怪壁書事件)으로 다시 많은 사림(士林)이 화옥(禍獄)을 입게 되었다.

을묘왜변
(乙卯倭變)

1555년
명종 10년

◈ 왜구가 전남 영암·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한 사건.
 삼포왜란(三浦倭亂:1510)·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1544) 등으로 세견선(歲遣船) 출입이 금지된 것에 반발해 왜구(倭寇)가 배 70여 척으로 전남 연안지방을 침입해 만행을 저지르다 영암에서 격퇴되었는데, 이후 세견선 5척의 출입을 허락하였다.

기축옥사
(己丑獄事)

1589년
선조 22년

◈ 정여립(鄭汝立)이 조정에서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함을 불평해 모반을 꾀하다가 실패한 후 이를 계기로 일어난 옥사(獄事).
 정여립은 비기참어(秘記讖語), 즉 '목자망전읍흥(木子亡奠邑興)'이라 하여 '이씨는 망하고 정씨(鄭氏)가 일어난다'는 설을 이용하여 이씨왕조(李氏王朝)는 망하고 자기[정여립]가 임금이 된다는 등의 말을 퍼뜨려 인심을 현혹하여 큰 난을 일으키려 했으나 1589년 10월에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등의 밀계(密啓)로 음모가 탄로나,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진안(鎭安) 죽도(竹島)로 도망하였다가, 여립은 자살하고 옥남은 잡혀 왔다. 당시 서인(西人)이었던 정철(鄭澈)이 옥사를 주도해 수많은 동인(東人)이 화를 입게 되었다.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년
선조 25년

◈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97년의 제2차 침략전쟁을 따로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의 역(役),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이라고 한다.
 전란으로 야기된 국제적 정세의 변화로 중국은 전란 중에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의 청(淸)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망하고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대신 도쿠가와[德川]의 막부(幕府)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정유재란
(丁酉再亂)

◈ 일본이 임진년 1차 침입이후 1597년(선조 30년)에 다시 조선을 침략한 2차 전쟁.

 

 

 

 

 

[이동] - 조선후기 - 조선근대

 

 


 

 

 

 

오형민의 이야기 한자여행입니다.

Copyright ⓒ since 1998 Oh HyungMin. All Rights Reserved.
webmaster@hanja.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