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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의 간지 관련 사건[2] - 연대순 [조선 후기]

 

 

간지 관련 사건

사건 개요

기유약조
(己酉約條)
1609년
광해군 1년

◈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하기 위해 일본이 끈기 있게 통교를 요청해 조선이 일본과 맺은 전문 13조의 송사조약(送使條約).

계축화옥
(癸丑禍獄)

1613년
광해군 5년

◈ 사색당파(四色黨派) 중의 하나인 대북파(大北派)가 일으킨 옥사(獄事).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는 선조의 적자(嫡子)이며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구실로 소북파(小北派)의 우두머리이며 당시의 영의정인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하는 등 소북파를 모조리 몰아내었고, 선조의 계비(繼妃)이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와 그의 친정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몰아내려 했는데, 때마침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인 이른바 박응서(朴應犀)의 옥사가 일어났고 대북파는 이들을 문초할 때 김제남과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허위자백케 하여 김제남을 죽였고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도에 유배하였는데, 후에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으로 하여금 그를 소사(燒死)하게 하였다.

정묘호란
(丁卯胡亂)

1627년
인조 5년

◈ 만주에 본거지를 둔 후금(後金: 뒤에 淸)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싸움.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가 '향명배금(向明排金)' 정책을 표방하자 중원 지역으로 확장하려는 후금은 배후인 조선이 두려워 침략하게 된다. 강화로 피신한 인조는 강화조약을 맺고 조선과 후금이 형제지국(兄弟之國)이 되었으나, 후에 다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난다.

병자호란
(丙子胡亂)

1636년
인조 14년

◈ 36년 12월∼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의 싸움.
 1627년 후금(後金)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兄弟之國)의 맹약을 맺었으나, 1632년 후금이 양국관계를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을 요구해 왔고,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을 쳐들어 왔다. 남산산성에서 치욕의 항복한 인조는 세자와 왕자, 삼학사(三學士) 등 많은 인질로 보내고 종속의 예를 다지게 되었다.

경신환국
(庚申換局)

1680년
숙종 6년

◈ 남인(南人)이 대거 실각하여 정권에서 물러난 사건으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하며, 이 사건으로 서인(西人)이 득세한다.
 1674년(현종 15) 예송(禮訟)에서의 승리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현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숙종으로부터는 신임을 얻지 못하다가, 인조의 손자이며 숙종의 5촌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3형제가 남인인 허견과 결탁하여 역모하였다는 것이 발각된 '삼복의 변[三福之變]’을 계기로 남인이 대거 축출되었다.

기사환국
(己巳換局)

1689년
숙종 15년

◈ 숙종 초기인 1680년(숙종 6)의 경신출척(庚申黜陟)으로 실세하였던 남인(南人)이 1689년 원자정호(元子定號) 문제로 숙종의 환심을 사서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일.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는 폐위되고 희빈 장씨가 정비(正妃)가 된다.

갑술환국
(甲戌換局)

1694년
숙종 20년

◈ 폐비된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南人)이 실권(失權)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 갑술옥사(甲戌獄事) 또는 갑술경화(甲戌更化)라고도 한다.
 1689년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집권한 남인(南人)이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왕비 책봉까지 승승장구 하다가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민암 등이 사사하고 소론의 김춘택(金春澤) 등이 집권한다.

기묘과옥
(己卯科獄)

1699년
숙종 25년

◈ 숙종대에 과거시험의 부정으로 일어난 옥사(獄事).
 단종(端宗)의 폐출과 시해 후 200년이 지난 숙종 때 단종을 왕으로 추존시키고, 이를 경축하기 위하여 증광과(增廣科)를 실시하여 임시로 과시를 시행했으나 이 과거에 상소로 '시험지 바꿔치기[符同易書]', '고군(雇軍) 바꿔세우기' 등의 부정이 있었음이 탄로가 나서, 시험은 파방(罷榜)이 됐다.

신임사화
(辛壬士禍)

1721년-22년
경종 1- 2년

◈ 1721년(경종 1: 辛丑年)-22년(경종 2: 壬寅年) 왕통문제와 관련하여 2년에 걸친 소론(小論)이 노론(老論)을 숙청한 사건.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축출된 뒤, 노론과 소론은 장희빈의 처벌문제를 놓고 대립하는데, 노론측은 장희빈이 정비인 인현왕후를 모해하였으므로 사사해야 된다는 주장을 한 데 반해, 소론측은 다음 왕이 될 세자를 위해 장희빈을 살려야 옳다고 주장하였다.
 노론은 경종 즉위 뒤 1년 만에 연잉군(뒤의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는 일을 주도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강행하려 하였다. 소론측은 노론의 대리청정 주장을 경종에 대한 불충(不忠)으로 탄핵하여 정국을 주도하였고, 결국에는 소론정권을 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정미환국
(丁未換局)
1727년
영조 3년

◈ 극심한 당쟁을 조정하기 위해 정국(政局)의 인사를 개편한 일.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강력하게 시행함으로써 노론(老論)·소론(少論)의 당쟁을 조정했다.

을해옥사
(乙亥獄事)

1755년
영조 31년

◈ 소론(少論)의 윤지(尹志) 등이 일으킨 모역(謀逆) 사건으로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라고도 한다.
 윤지는 1722년(경종 2) 임인무옥(壬寅誣獄)에 연좌되어 나주로 귀양갔다가 노론(老論)을 제거할 목적으로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 이효식(李孝植) 등과 모의하여 나주 객사에 민심동요 괘서를 붙였는데, 발각되어 거사(擧事)하기 전에 붙잡혀 영조의 직접 심문을 받고 2월에 박찬신(朴纘新) 등과 같이 사형을 당했다.

신해박해
(辛亥迫害)

1791년
정조 15년

◈ 정조대에 일어난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사건으로 신해사옥, 진산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한다.
 1791년 전라도 진산군(珍山郡)의 선비 윤지충(尹持忠)이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가톨릭교식으로 제례(祭禮)를 지낸 것에서 문제가 야기되어 조정에서는 사회도덕을 문란하게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사형에 처해 가톨릭교가 전래된 이래 최초의 순교자를 내었다. 이 문제로 남인은 신서파(信西派:가톨릭교 신봉을 묵인)와 공서파(攻西派:가톨릭교 탄압)로 대립하게 되어 1801년(순조 1)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신서파가 타격을 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갑인통공
(甲寅通共)

1794년
정조 18년

◈ 조선 정부가 육의전(六矣廛) 이외의 다른 시전(市廛)이 가졌던 금난전권(禁亂廛權)의 특권을 폐지하고 자유상인과 수공업자들도 도성 안에서 자유로이 상(商)행위를 할 수 있도록 조치한 통공발매정책(通共發賣政策).
 정조가 실학자 채제공(蔡濟恭)의 건의를 받아들여, 육의전를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통공정책을 실시해 상업 발전의 기틀이 되었다. 과정은 1787(정조 11)의 정미통공(丁未通共)과 1791년의 신해통공(辛亥通共)에 이어 1794년 갑인년(甲寅年)에 완성이 된 것이다.

을묘박해
(乙卯迫害)

1795년
정조 19년

◈ 청(淸)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체포 실패를 계기로 일어난 천주교(天主敎) 박해(迫害) 사건.
 이승훈(李承薰)·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 등이 유배되었고 후에 경신박해(1800년)·신유박해(1801년)로 이어진다.

신유박해
(辛酉迫害)

1801년
순조 1년

◈ 순조 즉위 후 정순대비 주도로 천주교도를 박해한 사건으로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한다.
 1801년 정월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서교(西敎)를 엄금·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려 이승훈·이가환·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기해박해
(己亥迫害)

1839년
헌종 5년

◈ 헌종대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 기해사옥(己亥邪獄)이라고도 함.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에서는 시파(時派)인 안동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벽파(僻派) 풍양조씨가 일으킨 것으로 세도 정치의 단면을 보여준 사건이다.

경신박해
(庚申迫害)

1860년
철종 11년

◈ 경신년(庚申年)에 일어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 1859년 12월 마지막 주에 시작되어 이듬해 9월까지 약 9개월 간 지속되었던 천주교도 탄압 사건.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천주교도 색출에 공을 세운 금위대장 임성고(任聖皐)의 아들 좌포도대장 임태영(任泰瑛)이 주동이 되어 조정의 명령도 없이 우포도대장과 짜고 사사로이 일으켰는데, 포도대장의 탐욕과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 적개심, 포졸들을 먹여 살릴 경제적 방편 등이 그 주된 원인이었다.

임술민란
(壬戌民亂)

1862년
철종 13년

◈ 삼남 약 71개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항쟁.
 중세 조선 사회 해체기에 사회모순이 전면화되는 상황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이다. 임술민란에서 농민들은 중세적인 조세제도를 철폐 또는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수령·관속에 대한 공격과 읍권 장악을 통해 무너져가는 중세적인 통치질서를 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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