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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의 간지 관련 사건[3] - 연대순 [구한말]

 

 

간지 관련 사건

사건 개요

병인박해
(丙寅迫害)
1866년
고종 3년

◈ 가톨릭교를 서학(西學)·사학(邪學)이라 배척하여 가톨릭교 탄압의 교령(敎令)을 포고해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을 학살하고 수개월 사이에 국내 신도 8,000여 명을 학살한 흥선대원군의 가톨릭교도 대량 학살 사건.
 병인양요(丙寅洋擾)의 발단이 된다.

병인양요
(丙寅洋擾)

1866년
고종 3년

◈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  병인박해 때 조선을 탈출한 프랑스 리델 신부는, 중국 톈진[天津]에 주둔한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천주교도 학살사건을 알렸고, 그 후 프랑스 군대는 강화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무기·서적·양식 등을 약탈하였다. 결국 프랑스가 물러간 후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는 등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더욱 굳히고, 천주교 박해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신미양요
(辛未洋擾)

1871년
고종 8년

◈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사건.
 당시 대(對)아시아팽창주의정책을 추진한 미국은 66년 8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두 차례 탐문항행을 실시하면서 셔먼호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71년 조선을 침략하였다. 하지만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조선에서 아무런 성과없이 일본으로 철수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병자조약
(丙子條約)

1876년
고종 13년

◈ 조선과 일본간에 체결된 조선의 개항을 유도한 불평등 조약. 속칭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한·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라고도 한다.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사건을 계기로 이루어진 강화도조약은 조선과 일본이 국제법적인 토대 위에서 외교관계가 성립된 것이지만 일본의 강압에 의한 조약으로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는 시발점이 되었고,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을 당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임오군란
(壬午軍亂)

1882년
고종 19년

◈ 임오년 6월 일본식 군제(軍制) 도입과 민씨정권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구식군대의 군변(軍變).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정권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守舊派)와 국왕과 명성황후측의 척족(戚族)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開化派)로 양분, 대립하게 되었으며 외교노선은 민씨정권이 추진한 문호개방정책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구미제국(歐美諸國)과의 통상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은 더욱 심해졌으며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백성들을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거듭되었다. 군변으로 시작한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 시켜주는 국제문제로 변하였고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갑신정변
(甲申政變)

1884년
고종 21년

◈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永孝)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 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1884년 10월 17일 정변에 성공은 개화파는 새정부를 구성하고 14개조 정강(政綱)을 발표했지만, 명성황후가 청(淸)의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에게 원병을 요청해 결국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막을 내리고 청일 양국은 톈진[天津(천진)]조약을 체결하였다.

갑오개혁
(甲午更張)

1894년
고종 31년

◈ 개화당이 집권한 이후 종래의 문물제도를 근대적 국가형태로 고친 일로 갑오개혁(甲午改革)이라고도 한다.
 갑오농민전쟁이 끝나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친일 김홍집 내각이 이루어진 이후 모든 분야의 근대적 개혁을 이룬 것이지만, 일본의 의도로 이루어진 타율적 개혁이었고 이후 러시아와의 대립 속에 을미사변의 씨앗이 되었다.

을미사변
(乙未事變)

1895년
고종 32년

◈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
 청일전쟁 승리 후 주도권을 잡은 일본에 대한 견제로 친러시아 경향에 대한 일본의 야욕적 음모로 벌어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다. 이 후 항일의병(抗日義兵) 활동과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계기가 된다.

을미개혁
(乙未改革)

1895년
고종 32년

◈ 을미사변(乙未事變) 직후 성립한 김홍집(金弘集)내각이 실시한 일련의 개혁운동.
 친일개화파의 갑오경장의 후속 개혁 정책으로 태양력의 사용, 군제·교육제도 등의 개혁과 함께 단발령(斷髮令)을 실시하였다.

경자모계사건
(庚子謀計事件)
1900년
광무 4년

◈ 일본에 망명중인 박영효(朴泳孝) 일당이 고종을 폐위하고 새 조각을 위하여 꾸민 음모 사건.

을사늑약
(乙巳勒約)

1905년
(광무 9)

◈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으로 속칭 을사보호조약이라고도 하고 제2차한일협약,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 을사조약이라고도 한다.
 을사오적(乙巳五賦)을 필두로 '한국 외교권의 접수, 일본 통감부(統監府)의 설치' 등을 중요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 조인하고 11월 18일에 이를 발표한다. 조약 체결 후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장지연(張志淵)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논설을 싣고 전국에 알려 조약 체결에 대한 거부와 일제에 대한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게 된다.

을사오적
(乙巳五賊)

◈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한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의 5대신.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

1907년
융희 1년

◈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위한 마지막 조치로 강행한 7개항의 조약으로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라고도 한다.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일제는 형해화(形骸化)한 대한제국의 국가체제에 마지막 숨통을 죄기 위해 법령제정권·관리임명권·행정권 및 일본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한 7개항의 조약안을 제시, 아무런 장애도 없이 1907년 7월 24일 이완용(李完用)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명의로 체결·조인하였다.

기유각서
(己酉覺書)

1909년
융희 3년

◈ 1909년 7월 12일 한국의 사법권(司法權) 및 감옥사무(監獄事務)의 처리권을 일본정부에 위탁하는 각서로‘한국사법 및 통감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라고도 한다.
 1907년에 체결한 한일신협약의 세부사항을 시행하기 위해 일본의 강압으로 조인되어 1910년의 경술국치(庚戌國恥)[속칭 한일합방(韓日合邦)]는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된다.

경술국치
(庚戌國恥)

1910년
융희 4년

◈ 1910년 10년 8월 22일 일제의 조선 강점의 마지막 단계로 한일합병조약의 체결이 이루어져 일제는 한국식민화 침략을 완성되었다.
 한국위정자들의 무능과 이완용(李完用)을 필두로 한 친일내각, 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 등으로 대표되는 일진회(一進會) 등 매국노들의 반역행위도 큰 몫을 하였고, 미국·영국 등 제국주위 열강국들의 묵인도 일본에게 도움을 주었다. 일본은 야욕을 달성한 뒤 종래의 통감부(統監府)를 폐지하고 보다 강력한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설치하여 같은 해 10월 1일부터 구체적인 한반도의 경영에 들어간다. 한일합방(韓日合邦)이란 용어보다는 우리의 입장에서 사용한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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