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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철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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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릉 이야기 - 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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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왕릉 소개

1대 태조: 건원릉,제릉 외

2대 정종: 후릉

3대 태종: 헌릉

4대 세종: 영릉

5대 문종: 현릉

6대 단종: 장릉, 사릉

7대 세조: 광릉

추존 덕종: 경릉

8대 예종: 창릉, 공릉

9대 성종: 선릉, 순릉

10대 연산군: 연산군묘

11대 중종: 정릉,온릉 외

12대 인종: 효릉

13대 명종: 강릉

14대 선조: 목릉

15대 광해군: 광해군묘

추존 원종: 장릉

16대 인조: 장릉, 휘릉

17대 효종: 영릉

18대 현종: 숭릉

19대 숙종: 명릉, 익릉

20대 경종: 의릉, 혜릉

21대 영조: 원릉, 홍릉

추존 진종: 영릉

추존 장조: 융릉

22대 정조: 건릉

23대 순조: 인릉

추존 익종(문조): 수릉

24대 헌종: 경릉

25대 철종: 예릉

26대 고종: 홍릉

27대 순종: 유릉


 조선 왕실세계표

 

 

 

 

   제11대 중종(中宗) - 정릉(靖陵)

 

 

 11.중종 - 정릉(靖陵)

소재지 :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35-4  { 宣靖陵 소재 }
사   적 : 제 199 호

靖陵의 특징
: 중종(이역;1488-1544, 재위39년)의 정릉이 현 위치인 성종(成宗)의
선릉(宣陵)에 인접한 곳에 위치하기 까지는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었습니다. 또한 왕비(王妃)가 3명이나 되었으면서도 같은 곳에 능이 조성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세 번째 왕비였던 명종(明宗)의 생모(生母)인 제2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 때문입니다.
 처음 중종 승하 후 제1계비였던 장경왕후(章敬王后) 능인 희릉(禧陵;서삼릉 소재) 옆에 조성되었으나, 1562년[명종 17년]에 당시 권력을 움직였던 문정왕후에 의해 현 위치로 옮겨진 것입니다.
 겉으로는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따라 옮겼다고 했지만, 오히려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沈水)되었기에 결국 중종의 옆에 같이 잠들고 싶었던 문정왕후는 자신의 능을 다른 곳{태릉}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중종의 정릉(靖陵)을 잘못 옮김으로 인해 그 다음 해에 명종(明宗)의 세자인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서거하고, 2년 뒤에는 문정왕후 자신, 또 2년 뒤에는 명종(明宗)이 승하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결국 임진왜란 당시에 왜적(倭賊)에게 도굴까지 당하게 되는 비운의 능이 됩니다.
 능역의 양식은 함께 있는 성종의 선릉(宣陵) 양식을 따라 웅장하게 조성되어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구름 문양까지 조각했습니다. 

中宗代의 사료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506

1년

11월, 연산군 병으로 죽음{1476- }

1521

16년

6월, 노산군(魯山君) 부인 송씨(宋氏) {단종 비-정순왕후} 죽음{1440-}

1507

2년

6월, <연산군일기> 수찬 시작

1524

19년

11월, 김안로(金安老) 파직,유배됨

1509

4년

9월,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완성

1527

22년

3월, 동궁(東宮) 작서(灼鼠)의 변(變)

1510

5년

4월, 삼포왜란(三浦倭亂) 일어남

4월, 최세진 [훈몽자회(訓蒙字會)] 찬진

1513

9년

12월, 성균관 존경각(尊慶閣)서적 소실

1529

24년

5월, 김안로를 방면(放免)함 

1515

10년

2월, 원자(元子-仁宗) 출생

1531

26년

6월, 김안로 대호군(大護軍)이 됨 

8월, 박상(朴祥)등 단경왕후 복위 상소

1537

32년

1월, 모화관에 영조문(迎詔門) 세움

1517

12년

8월, 정몽주(鄭夢周)문묘(文廟)배향

8월, 희릉(禧陵)을 천장(遷葬)함 

1518

13년

9월, 소격서(昭格署)를 폐함

10월, 김안로 사사(賜死)하고 형제 유배

1519

14년

5월, 조광조(趙光祖) 대사헌 됨

1538

33년

11월, 성주사고(星州史庫) 전소(全燒)

12월, 조광조 사사(賜死)-기묘사화

1543

38년

10월, 주세붕(周世鵬) 백운동서원 세움 

1520

15년

11월, 골육상송(骨肉相訟)을 금함

1544

39년

11월, 왕 승하{1488- } 

뒷 이야기
 : 권력의 암투에 의해 임금의 능력이 시험대에 오른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중종대 역시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말았던 안타까운 시대라 할 것입니다. 중종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슬하에서 태어나 자신의 이복(異服) 형이었던 연산군(燕山君)을 폐위했고, 자신의 부인{단경왕후}까지 폐위시킨 장본인 이었기에 처음부터 당대의 국왕의 힘은 필연적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조광조(趙光祖)의 이상적 정치의 실현이 좌초되었을 때{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 불안한 정국은 사회발전을 지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발전한다는 진리처럼 권력 내부의 혼미는 외부의 결속을 가속화시키는 기반으로 작용했고 훈구세력의 몰락의 길이 열리기 시작한 시기도 또한 이때입니다.
 

 

 

  中宗의 비(妃) 단경왕후(端敬王后) - 온릉(溫陵)

 

 

중종비 단경왕후 - 온릉(溫陵)

소재지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산 19
사   적 : 제 210 호

溫陵의 특징
: 중종의 정비(正妃)인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1487-1557)의 온릉은 왕비 책봉 1주일 만에 폐위되는 불우한 신씨의 일생을 대변하듯 조촐하게 조성되어, 현재 비공개 능으로 남아 있습니다. 단경왕후는 중종반정(中宗反政)에 반대했던 아버지{신수근}로 인해 폐위되어 1557년[명종 12년] 71세의 나이로 사저에서 승하한 뒤 본가 선영에 묻혔다가 1739년[영조 15년]에 복위(復位)되어 단경(端敬)의 시호와 온릉(溫陵)의 능호를 받고, 뒤에 추복된 단종(端宗)의
장릉(莊陵) 양식을 따라 능역이 조성되었습니다.

단경왕후 약사(略史)
: 단경왕후 신씨는 연산군(燕山君)대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태어나 1499년[연산군 5년] 13세 때에 당시 진성대군(晉城大君;中宗)과 혼인을 맺었으나, 몇 년 뒤 중종반정(中宗反政)은 온 집안의 몰락을 가져옵니다.
 아버지의 반정(反政) 반대로 인한 죽음, 고모였던 연산군 부인 신씨(愼氏) 등의 폐위와 함께 1506년 왕비 책봉 7일만에 반정세력에 의해 폐위되는 운명을 맞습니다. 결국 슬하에 자식도 없이 권력의 암투 속에 희생양(犧牲羊)이 되고 말았던 안타까운 비운의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중종 계비 장경왕후 - 희릉(禧陵)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 37-1 <西三陵 소재>
사   적 : 제 200 호

禧陵의 특징
 :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1491-1515)의 희릉은 중종의 정릉(靖陵)처럼 천장(遷葬)되어 현재의 서삼릉(西三陵) 능역 가운데에서 처음으로 조성된 능입니다. 원자{인종(仁宗)}를 낳고 1515년 25세의 나이로 승하한 장경왕후는 처음 태종(太宗)의 헌릉(獻陵) 옆에 조성되었으나, 1537년(중종 32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역시 중종의 부마(駙馬)였던 김안로(金安老)의 권력 암투가 희릉 천장(遷葬)의 사단(事端)이었습니다.
 희릉은 봉분의 병풍석(屛風石) 없이 모든 양식을 조선 전기의 왕릉 양식에 따르는 전형적인 능역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장경왕후 약사(略史)
 : 장경왕후는 1491년(성종 22년)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여필(尹汝弼)의 딸로 태어나 중종 원년(1506년)에 궁궐에 들어와 숙의(淑儀)에 봉해졌다가 단경왕후가 폐위(1506년)되자 다음해에 왕비에 책봉됩니다.
 슬하에 효혜공주와 인종(仁宗)을 두었는데, 바로 인종 출산후에 산후병으로 승하한 것입니다.{중종 11년}

 

 

   中宗의 제2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 - 태릉(泰陵)

 

 

중종 2계비 문정왕후 - 태릉(泰陵)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산 223-19 <泰康陵 소재>
사   적 : 제 201 호

泰陵의 특징
: 중종(中宗)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 1501-1565)의 태릉(泰陵)은 명종(明宗)의
강릉(康陵)과 함께 태강릉(泰康陵)으로 불리우면서 주변의 태릉 푸른동산, 태릉선수촌 등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입니다.
 재위 1년을 못넘긴 인종(仁宗)을 이어 13대 명종(明宗)이 즉위하면서 명종의 생모(生母)였던 문정왕후가 권력을 장악했었기 때문에 사후(死後)의 능역 조성 역시 웅장하고 화려하게 이루어 졌습니다. 유난하게 거대한 석인(石人)의 얼굴과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에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十二支身像) 등은 당대 권력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文定王后 약사(略史)
 : 문정왕후 윤씨는 1501년(연산군 7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임(尹之任)의 딸로 태어나 17세{중종 12년}에 왕비에 책봉되었고, 중종(中宗)과의 슬하에 명종(明宗)과 네 공주를 두었습니다.
 문정왕후는 일생이 아주 화려해서 자신이 왕비(王妃)에 오른 것도 중종의 제1계비(繼妃)였던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가 인종(仁宗) 출산 후 승하해서 이루어졌고, 아들 명종(明宗) 역시 인종(仁宗)의 요절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천운(天運)이 작용한 것 같다는 속설(俗說) 전해오는데, 더욱이 12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明宗)을 대신해 8년간이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기에 권력의 정상에 오른 것입니다.
 인종(仁宗)의 외척 세력을 제거했던 을사사화(乙巳士禍;1545년) 이후 권력의 정상에 군림했던 문정왕후가 생애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은 바로 중종(中宗)의 옆에 묻히지 못한 것입니다. 중종과 능역을 함께 하기 위해 현재 서삼릉(西三陵)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옆에 조성했던 중종의 정릉(靖陵)을 성종(成宗)의 선릉(宣陵) 가까이 있는 봉은사(奉恩寺) 곁으로 옮겨 놓았지만 낮은 지대로 인해 자주 침수되어 문정왕후 자신은 결국 그곳에 묻히지 못하고 현 위치로 정해진 것입니다.
 또한 문정왕후는 불교(佛敎)에 심취하여 봉은사에 보우(普雨)를 주지(住持)로 두고 왕실에서의 불교 부흥에 많은 작업을 했지만, 문정왕후 사후(死後) 보우는 유배지에서 죽고 불교는 다시 배척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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