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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철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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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릉 이야기 - 대문

  왕릉 안내

  동구릉

  서오릉

  서삼릉

조선조 왕릉 소개

1대 태조: 건원릉,제릉 외

2대 정종: 후릉

3대 태종: 헌릉

4대 세종: 영릉

5대 문종: 현릉

6대 단종: 장릉, 사릉

7대 세조: 광릉

추존 덕종: 경릉

8대 예종: 창릉, 공릉

9대 성종: 선릉, 순릉

10대 연산군: 연산군묘

11대 중종: 정릉,온릉 외

12대 인종: 효릉

13대 명종: 강릉

14대 선조: 목릉

15대 광해군: 광해군묘

추존 원종: 장릉

16대 인조: 장릉, 휘릉

17대 효종: 영릉

18대 현종: 숭릉

19대 숙종: 명릉, 익릉

20대 경종: 의릉, 혜릉

21대 영조: 원릉, 홍릉

추존 진종: 영릉

추존 장조: 융릉

22대 정조: 건릉

23대 순조: 인릉

추존 익종(문조): 수릉

24대 헌종: 경릉

25대 철종: 예릉

26대 고종: 홍릉

27대 순종: 유릉


 조선 왕실세계표

 

 

 

 

   제4대 세종(世宗)과 소헌왕후(昭憲王后) - 영릉(英陵)

 

 

영릉 - 세종과 소헌왕후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
사 적 : 제 195 호

英陵의 특징
: 세종(이도:1397-1450, 재위32년)과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1395-1446)의 영릉은 본래 소헌왕후 승하{세종 28년} 후 태종의
헌릉(獻陵) 영내에 하나의 봉분(封墳)에 석실(石室)을 둘로 하는 합장(合葬) 형태의 동릉이실(同陵異室)로 조성하고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조(世祖) 대에 천장(遷葬)의 논의를 하고 결국 예종(睿宗) 1년(1469년)에 경기도 여주(驪州)로 천장(遷葬)하여 단릉(單陵)의 합장(合葬) 형태로 만들었는데, 세조(世祖)의 광릉(光陵) 제도를 따라 석실(石室)과 병풍석(屛風石)은 쓰지 않았습니다.
 초기 영릉의 석조물(石造物)들은 그대로 매장(埋葬)되었는데, 이 때 신도비(神道碑)도 함께 묻고는 여주의 새 능에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임금의 자취는 국사(國事)에 실려 있기 때문이라 했고, 이는 5대 문종(文宗) 때부터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던 일로 인한 것입니다.
 영릉의 능원(陵原) 구조는 봉분(封墳)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欄干石)만 두른 단릉(單陵)으로 상석(床石)이 두 개 놓여 합장릉(合葬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정자각(丁字閣) 왼쪽에는 수라간(水刺間)이 있어 제사 때에 제물(祭物)을 준비하는 곳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아울러 바로 인접한 곳에 17대 효종(孝宗)과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張氏)를 모신 영릉(寧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世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419

1년

6월, 삼군도체찰사 이종무 쓰시마정벌

1443

25년

4월, 세자에게 정사를 섭행 시킴

9월, 정종(定宗) 승하{1357- }

12월,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1422

4년

5월, 태종(太宗) 승하{1367- }

1445

27년

11월, 실록(實錄)을 충주, 전주, 성주(星州)의 삼고(三庫)에 분장시킴

1423

5년

2월, 남산에 봉화대(烽火臺) 설치

1424

6년

9월, 조선통보(朝鮮通寶) 주조

1446

28년

10월, 공문서에훈민정음 사용

1426

8년

8월, 춘추관<정종실록(定宗實錄)>완성

12월, 이과(吏科),사전(史典) 등 시험에 훈민정음 시험과목화 함

1431

10년

춘추관 <태종실록(太宗實錄)> 완성

1434

16년

7월, 신활자 갑인자(甲寅字) 주조

1448

30년

7월, 성균관생 및 오부학당 생도 등이 불당 건립에 반대하여 동맹휴학함

1437

19년

1월, 흉년으로 도적 성행-관리봉록삭감

1440

22년

2월, 남녀 성혼기 정함(남16,여14이상)

1450

32년

2월, 세종 승하{1397- }, 왕세자(文宗) 즉위
* 독일 구텐베르크 활자인쇄술 창안

1441

23년

8월, 측우기(測雨器)비치,양수표 세움

뒷 이야기
: 32년간 재위(在位)했던 세종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재론(再論)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역대 임금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자세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수록된 방대한 치적을 살펴보면 다른 실록에서는 볼 수 없는 '지(志)'의 수록을 통해 당대의 완비된 문물(文物) 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의례(儀禮)에 관한 {오례(五禮)}, 아악(雅樂)에 관한 {악(樂)}, 역사 인문을 망라한 지리서인 {지리지(地理志)}, 천문(天文)에 관한 {칠정산(七政算)} 내외편 등 당시의 다양한 분야의 연구 업적이 얼마나 방대한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슬하에는 문종(文宗), 수양<세조(世祖)>, 안평,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대군의 8남과 정소, 정의공주의 2녀를 두었습니다. 수많은 치적을 이룬 성군(聖君)으로 일컫는 세종과는 달리 왕비 소헌왕후는 영의정을 지낸 부친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이 태종에 의해 사사(賜死)되는 비운을 겪고, 세종 14년[1432년]에야 왕비로 개봉(改封)됩니다. 또한 자신 두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등 다소 불우한 일생을 마쳤습니다.[세종 28년]
 영릉의 원찰(願刹)인 신륵사(神勒寺)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오는데, 여주로 영릉을 옮긴 후에 원찰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로 개칭했지만 성리학(性理學)의 영향으로 원찰(願刹)제도가 사라져 본래의 신륵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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